[시사IN 출처] 엄기호 (덕성여대 강사·문화인류학과)- 한국의 교육은 이렇게 발견이 아니라 확인하러 다니는 여행과 비슷하다. 여행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배움은 자신이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무지한 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앎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배우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를 드러내는 '용기'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교실이 무지를 드러내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용기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수한 자'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환영받을 때 그 공간은 배움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교실에서 배우는 자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말하기가 무엇인가? 질문이다.
ⓒ그림 박해성
그러나 한국의 교실에서 질문은 억압되고 있다. 수업을 마치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가만히 있는다. 재미없는 수업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흥미진진하게 듣는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다 알아들어서 질문이 없을 리가 없다. 학생들과 왜 수업 시간에 질문하지 않는지를 이야기해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쪽팔릴까 봐 겁이 나서'였다.
수업을 듣다 보면 '저건 아닌데?'나 '어 저건 왜 저렇지?'라는 의문이 당연히 든다. 그런데 그 순간 대부분 이걸 질문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망설이게 된다고 한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에서부터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조롱까지를 감수해야 겨우 질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들 한번쯤은 이런 '개망신'당한 경험이 있기에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르면 질문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질문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된 이유는 한국의 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무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험이다. 시험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치르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치른다. 그래서 시험을 치고 나면 '알았다/몰랐다'가 아니라 '맞았다/틀렸다'고 말한다. 모르는 것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고 그것은 감추어야 한다. 그러니 질문을 하는 것은 꺼려진다. 한국의 교실은 발견의 재미는 사라지고 확인의 강박에만 시달리는 여행과 꼭 닮았다.
질문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된 이유는 한국의 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무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험이다. 시험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치르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치른다. 그래서 시험을 치고 나면 '알았다/몰랐다'가 아니라 '맞았다/틀렸다'고 말한다. 모르는 것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고 그것은 감추어야 한다. 그러니 질문을 하는 것은 꺼려진다. 한국의 교실은 발견의 재미는 사라지고 확인의 강박에만 시달리는 여행과 꼭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