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011·017, 못 놓는 사람들의 사연
"대부분 사람들이 신용 문제가 생기면 전화번호부터 바꿉니다. 27년 동안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건 '믿을 만한 사람'이란 뜻이죠. 011은 제 신용의 보증수표였습니다."
일산에서 자동차 협력업체를 운영하는 김재민(57)씨는 27년째 똑같은 '011' 번호를 쓴다. 휴대전화는 여러 번 바꿨지만, 번호는 1993년 처음 휴대전화를 샀을 때 그대로다. 2G망을 쓰는 김씨는 재난문자를 받지 못하고, 오늘 보낸 문자 메시지가 내일 도착하는 일도 잦다. 그래도 김씨는 011 번호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제게 휴대폰 번호는 주민번호 같아요. 죽을 때까지 쓰다 국가에 반납하고 싶습니다."
지난 1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SK텔레콤의 2G 서비스 종료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발표 직후 '011·017 번호가 사라진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궁금해졌다. 아직까지 번호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이제는 놓아주겠다는 사람들은 또 어떤 마음일까.
치매 앓는 어머니도 기억하던 011, 만화방 사장님 다시 만나게 해준 011
"치매 증세가 심해 병원에 찾아온 친척 얼굴도 잘 못 알아보시던 팔순 노모가 제 휴대폰 번호는 안 까먹고 전화하세요. 이제 아들 번호가 바뀌면 어머니가 어떻게 전화하실지…."
전라북도 순창에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김동완(56)씨는 반평생을 011 번호와 함께했다. 1992년 시멘트 회사에 입사할 당시 받은 번호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세월이 흐르며 직업도, 호칭도 바뀌었지만 휴대폰 번호는 하나였다.
김씨도 지난 15일 '다음 달 6일까지 010 번호로 바꾸라'는 안내 문자를 받았다. "28년 써오던 번호를 21일 만에 바꾸라는 거예요. 안 바꿀 도리가 없으니까 바꾸긴 하지만…. 답답하죠."
'끝까지 버티겠다'는 이도 있다. 경기 의정부시에 사는 직장인 이상중(38)씨는 22년째 011 번호를 쓰고 있다. 이씨는 "내 번호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는데, 휴대폰 번호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 동네 만화방 사장님과 친했죠. 가게까지 대신 봐줄 정도였는데, 군대 다녀오니 책방이 없어졌습니다. '사장님과도 이제 끝이구나' 생각할 무렵,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더군요. '우연히 다이어리를 뒤지다 네 번호를 봤다'면서요. 이런 추억이 깃든 번호를 그냥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는 "01× 번호 폐지 철회 불가"
사실 01× 번호 폐지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정부는 이미 2004년부터 010 번호통합 정책을 시행했다. 통신사들이 국가 자원인 전화번호를 브랜드화해 독과점 현상이 심해졌다는 이유였다.
2G 이용자 수가 급격히 줄면서 통신사업자들은 서비스 종료를 앞당겼다. 현재 SK텔레콤의 2G 이용자는 약 38만4000명. SK텔레콤이 2G 서비스망을 유지하는 데만 연간 1000억원 이상이 든다. KT는 이미 2012년 2G 서비스를 종료했고, SK텔레콤도 망 사용이 종료되는 내년 6월보다 1년 일찍 서비스를 종료하게 됐다.
'01× 번호로 3G 이상 서비스를 이용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반박도 있다. 010통합반대본부 박상보 대표는 "2G 서비스 종료와 01× 번호 이용은 별개의 문제인데, 정부가 이를 함께 엮어 넘기는 것"이라면서 "2G 서비스를 종료하더라도 01× 번호는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정책의 일관성과 형평성 등을 고려할 때 01× 번호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엄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통신정책기획과장은 "15년 이상 010 번호 통합 정책을 국민께 알려왔고, 이미 6400만개 이상의 번호가 010으로 이동했다"면서 "지금 와서 정책을 뒤집기는 어렵다"고 했다.
SK텔레콤이 2G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이제 2G 통신사업자는 LG유플러스만 남았다. LG유플러스의 2G용 주파수도 내년 6월에 만료된다. 이번 달까지 재할당 여부를 과기정통부에 전달해야 한다. LG유플러스도 서비스를 종료하면 01× 번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LG유플러스에는 아직 47만5500명의 2G 가입자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