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차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도로 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이들은 어릿광대 옷을 입고는 몇 개의 공을 돌리거나 불을 뿜는 묘기를 보여 준다. 또 가족처럼 보이는 팀은 인간 탑을 만들거나 한 명이 공연하고 있는 동안 엉덩이에 풍선을 접어놓고는 돈을 걷으러 다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자동차 유리창을 닦아 주는 사람들이다. 신호등마다 몇 명씩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을 피해 가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앞 유리창에 비누 거품부터 뿌려 대니 서비스를 거부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제는 아침마다 동전 몇 닢을 미리 준비하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이들이 한 번 노동으로 받는 돈은 그야말로 동전 한 닢이다. 한국 돈으로 치면 고작해야 백 원, 정말 운 좋으면 오백 원 정도. 이런 노동조차도 포기한 채 막무가내로 구걸하는 이들도 동전 한두 푼은 챙긴다. 멕시코는 음식 값이 비싸지 않아 이들이 하루를 연명할 수야 있겠지만, 이들 사이에서 각종 질병이 발생하고 그 확산 속도 또한 빨라 이제는 커다란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더욱이 이들 가운데 “거리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미성년자 숫자만도 10만 명을 넘어설 정도니 전체 규모를 본다면 어지간한 도시를 채우고도 남을 일이어서 “뭔 거지들이 이렇게 많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멕시코인의 시각이 생각처럼 냉랭한 것은 아니다. 허름한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와 같은 서민일수록 거리 세차를 거부하는 적이 없고, 아침마다 전철역 부랑아에게 동전 하나씩 꼬박꼬박 건네는 이들도 있다.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일종의 “쇼” 형태와 더불어 세차 서비스 혹은 어설픈 노래라도 보여 주며 그 대가인 “모네다(moneda:동전)”를 요구한다. 비록 비굴해 보이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귀찮게 여기더라도 그저 깡통 하나 놓고 지하철 역 한구석에 죽은 듯 엎드려 있는 한국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한 들을 이삼십만 원으로 살아야 하는 지독한 극빈층과 작은 아파트 단지 하나만 한 넓이의 집에서 사는 이들이 공존하는 심각한 빈부 격차, 지나치게 낙천적인 민족성 탓일까. 아니면 어떤 노력에도 희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그들이 택한 최선의 방법이 “거리의 삶”이라는 점은 이방인인 나에게도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