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언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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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0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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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사람 중에 특이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 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사람들하고도 썩 잘 지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그 언니와 친해지고 나면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성격이 나쁘다거나, 변덕을 부린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무언가를 감추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도 저 사람 마음 속을 절대로 모르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언니랑 오랜시간 동안 같이 있으면 왠지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엔 그렇게까지 친한 편은 아니어서 실제로 그 느낌을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많이 많이 친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깨닫게 된 계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 언니가 어느 날 저에게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무언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꿈이라는 건 모두 말도 안되고 이상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언니의 이야기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감은 안잡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었죠.


언니는 꿈에서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왠지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고 하면서 계속 물 소리랑 자기 발소리만 들으면서 걸어갔대요.

사방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였는데 맞은 편에 희미하게 빛 같은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렴풋이 '터널 같은 곳이겠거니' 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계속 걷다보니 길이 갑자기 오르막길이 되어 높은 곳 까지 올라갔다가, 또 어느 순간 내리막길로 바뀌었는데 발을 헛딛어 굴러 떨어졌답니다.

그런데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멀쩡한지라 일어서서 그냥 계속 걸었대요.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빛이 가까워 지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이 끊어져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꿈에서 깨었다고.


"임사체험 같은 것 보면 늘 터널 이야기가 나오잖아. 그런걸까?"

그런 농담까지 치면서 언니는 참 이상한 꿈이였어~하고 웃어 넘겼습니다.

저도 "언니가 만약 끝까지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면서 농담으로 넘겼죠.

그렇게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저는 불현듯 든 생각에 언니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무섭지 않았어?" 라고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곳을 혼자서 걷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도 어디에선가 흐르는 물소리와 텅 빈 어둠 속에 울리는 자기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당연히 아무리 강심장인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언니는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로 "그게 왜 무서워?" 라며 오히려 제게 물었습니다.


그 때 언니의 대답을 들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묘한 불안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제가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이상한 느낌에 대해서도...


언니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조금 둔한 것 같았습니다.

다 같이 웃으면서도 '무엇이 즐거운 건지'는 몰랐던 것이죠.

그러니 아무리 똑같이 웃고 울어도 무언가 약간 어긋나거나 부족한 느낌이었을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 느껴왔던 그 묘한 느낌은 바로 그런 것이였겠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는 말도 이해가 됐구요.


보통 사람이 그런 꿈을 꾸었다면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걷고 있었다. 무서웠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언니의 이야기에는 끝까지 자기가 느낀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죠.

'빛이 가까워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 같으면 정말 무섭고 불안했을 겁니다.

게다가 '길이 끊어져서 갈 수 없었다'는 것은 그 곳에 갇혔다는 뜻인데,
그 상황에서도 아무런 감정 없이 깨어났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죠.


꽉 막힌 깜깜한 어둠 속을 태연하게 걸어갔을 언니를 생각하면 조금 무서운 느낌도 듭니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삶이라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그런 언니를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도 드네요.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언니는 책에서 이론을 보고 배우듯이 그렇게 감정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웃을 때는 즐거운 것.

귀신이 나오는 것은 무서운 것.

무언가를 잃거나 누군가가 사라졌을 때는 슬픈 것.

언니의 '매뉴얼'에는 '어두운 터널을 혼자 걷는 것은 무서운 것'이라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무서운 것이라는 걸 몰랐다고 하네요.


하지만 언니는 잘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많이 노력하거든요.

지금은 멋진 남자친구도 생겨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언니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왜 나한테 그런 말을...ㅠㅠ

(위 사진은 네이버 포토 갤러리 '하루내(jwheo)'님 작품입니다!)


글이 아주 길어졌지만 조금 더 덧붙입니다.

우리나라에 영화로도 만들어 졌었던 <검은집>이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그곳에서 싸이코패스로 등장하는 여자가 어릴 적에 썼던 '나의 꿈'이라는 글을 분석하는 내용인데요. 이 부분을 읽으면 언니 생각이 납니다. ㅎㅡㅎ


"나는 그네를 타고 발을 굴렀습니다. 계속 탔습니다. 그랬더니 훨씬 높은 곳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미끄러져서 그네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계속 떨어져 갔습니다."


단순한 동작 설명만 늘어놓았을 뿐 정서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말이 하나도 없잖아요?

꿈속에서의 하늘과 땅은 무의식의 양극을 나타내고 있어요.

하늘은 집합적 무의식의 영역이고 땅은 신체적인 영역을 가리키지요.

그러한 극과 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재미만 느끼고 아무런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요.

특히 마지막 부분에 있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곳에 이르면, 보통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숨이 막힐 지경일 거예요.

ㅡ검은 집 (기시 유스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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